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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나 교수의 몽골인의 생활과 풍속 38
몽골의 신앙과 종교 - 어워
 

  
산이나 물에 대한 자연 신앙의 한 형태에 어워 신앙이 있다. 어워란 일종의 돌무지를 말하며, 지금까지 한국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를 한국의 서낭당과 유사한 신앙적 대상물로 해석해 왔다. 

어워의 기원은 원시인들이 자연의 힘에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던 때에 여러 가지 자연재해를 당하거나 질병 등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을 때 주변 지역의 산천신이 분노하여 재앙을 내린 것으로 생각하여, 신을 위무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본다. 즉, 산과 물의 주인(신)이 깃드는 곳을 시각적으로 가시화한 표시로, 자연신앙의 신격이 의인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종교적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지신 신앙은 산천신 숭배로 그 이전 자연 신앙이 좀더 인간화, 추상화된 형태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어워라는 종교적 신앙물로 구체화된다. 이와 같이 어워는 산의 형상을 세계 축으로 하고, 때로 나무(주로 버드나무)를 세워 천신이 내리는 강림처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몽골 사람들은 어워와 수호신, 천신을 하나로 관념한다. 

어워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그 기원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으며, 역사적으로 보면 13세기 자료에 나타나지만, 이것은 신앙의 발전단계로 보아 훨씬 이전 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몽골의 어워는 최소한 샤머니즘의 초기 단계 즈음에는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어워는 지신 신앙의 종교적 상징물로 세워졌다가, 그 다음 단계의 천신 신앙을 흡수한 종교적 대상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학자는 모계제 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어 가는 전환기에 생겨났다고 본다. 

고대인들은 불을 돌 속에 간수했으며 이러한 화덕의 돌과 돌무지인 어워가 모종의 관련을 지녔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또 무속이 지배하던 고대 몽골에서는 어워에 무당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무당의 영혼을 부르며 굿을 하는 어워제가 있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13세기 자료로 [몽골 비사] 등에 나오는 ‘고아 더브’ (언덕), ‘언더르 더브’, ‘후레 더브’ 등이 고대 무속의 중심지였으며, 이곳은 어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보았다.

어워는 무속 에너지의 지고의 거점이며 하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 불교적으로 이해로 보면 절과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어워는 몽골의 성산이면 어느 곳이나 있으며, 이 어워를 중심으로 산신제가 거행되었다. 인간 생활의 고통을 주는 가뭄이나 자연재해, 질병이나 어려움이 생길 때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어워제를 드렸다.

어워는 유목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몽골 사람들은 충분한 초지를 제공하는 대지와 그 초지를 가능하게 하는 태양, 비 등을 내려 주는 하늘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경외의 마음을 드러내고, 앞날의 삶을 가호하고 축북을 내려 줄 것을 기원하며 어워를 세웠다. 또한 먼 길을 떠날 때 높은 산이나 고개 위에 어워를 세워 방향을 가늠하는 방향자가 되게 했으며, 어워는 초원의 험한 여행길에서 여행객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다. 전쟁을 떠날 때에도 어워에 제의를 드림으로써 하늘에 가호를 비는 의식을 행했다. 

현재 몽골에서 어워제를 드리는 곳은 800여 곳에 이르며, 신성이 거하여 제의를 드리는 어워는 420여 개가 된다.

어워는 큰 산이나, 언덕, 고개 위나 강, 호수, 샘물 옆에 또 초원 등에 만들어지며, 몽골의 어느 지역을 가든 쉽게 볼 수 있다. 

어워는 돌로만 되어 있는 것, 돌 위에 나무를 세워 놓은 형태, 타이가 지역의 나무 어워, 돌이 거의 없는 곳에서는 흙으로 된 것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돌을 쌓고 맨 위에 기나 하득을 묶은 버드나무나 나뭇가지 등을 꽂아 놓은 형태이다. 몽골의 할하 사람들은 버드나무를 숭상하며 이 나무를 ‘몽골 나무’라고 부른다. 이렇게 버드나무에 하득이나 천 또는 종이를 묶어 장식한 것을 잘마라고 한다. 

몽골의 흑무당들이 저주 등을 행할 때 어린 전나무나 낙엽송, 검은 하르간 등을 검은 천으로 장식했는데, 이것을 ‘잘마’라고 했다. 이렇게 행한 저주에 대응할 때, 어린 낙엽송이나 검은 하르간 등의 나무를 검은색으로 장식하고, 자작나무, 버드나무, 잣나무 등을 흰 천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검은 것으로는 저주가 이른 쪽을 향해 불에 태우고, 흰 것으로 장식한 나무는 무당 자신의 집 화로에 모셔와 태웠다고 한다.  

어워의 종류로는 알탕 어워, 길 어워(고개 어워), 샘 어워, 약수 어워(성수), 초원 어워, 기념 어워, 경계 어워 등이 있다. 어워의 성격으로 보면 크게 하늘 어워, 인간 어워, 대지 어워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헹티 아이막의 보르항 할동 산의 오른쪽 정상에 있는 큰 어워를 ‘하늘의 어워’라고 부르는데, 이 어워에는 칭기스칸 가문의 무당들이 제의를 드리며 승려나 여자들은 올라갈 수 없다.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12.18

이안나 교수의 몽골인의 생활과 풍속 39
몽골의 신앙과 종교 - 어워(2) 

알탕 어워는 장대하고 위엄있는 산 즉 버그드 산, 하이르항 산에 세우는 어워를 말하며, 이 어워는 해마다 정해진 날짜에 제의를 드린다. 이 어워가 있는 산은 매우 신성시하며, 그 주변에서는 행동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즉 나무나 풀을 손상시키는 행위, 땅을 파고 구멍을 내는 행위, 사냥뿐 아니라 야수나 새를 놀라게 하는 행위, 주변을 더럽히는 행위 등을 금한다. 이를 어기면 산신을 노하게 하여 재앙과 재난을 만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길(고개) 어워는 고개의 꼭대기, 숲 가운데 바위가 많은 험한 길 옆에 세운 어워를 말한다. 해마다 행하는 큰 제의는 없지만 어워 옆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반드시 말에서 내려 돌을 올리고 사찰을 드리며 길의 안전을 기원한다. 돌을 올리는 실제적인 이유 중 하나는 사람이나 가축이 가는데 방해가 되는 돌을 치우는 데 있다. 샘 어워는 강과 샘의 원천 또는 샘 옆에 세운 어워이다. 샘은 가축에게 마실 물을 제공하는 곳으로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어워를 세운다. 샘 어워에 젖으로 사찰을 드리지만 젖이 든 통 등을 샘이나 강물에 넣는 행위를 금한다. 기름 등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이 물에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특히 샘에서 물을 길을 때는 매우 주의한다. 만약 샘이나 강물에 더러운 것이 닿으면, 수신의 노여움을 사 인간과 가축에 전염병이 퍼지거나 샘물이 마르게 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목자들은 물을 매우 소중히 생각하여 옷을 빨 때도 물을 떠서 적당한 거리에서 빨며 꾸정물을 강에 쏟지 않는다. 강 가까이에서 소변이나 대변을 보는 것도 금했다.

약수(성수) 어워는 약수 가까이에 있는 높고 위용 있는 산의 정상에 세운 어워를 말한다. 몽골 사람들은 성수에 들어가 몸을 치료할 때 가장 먼저 성수 어워에 가서 가지고 있는 유제품 가운데 가장 좋은 것으로 사찰을 드리고 병이 낫기를 소원한다. 적당한 기간이 지나 몸의 상태가 호전되어 떠날 때 다시 어워에 올라가 돌을 더하고 사찰을 드려 감사를 표한 후, 병의 징후를 나타내는 사물 가운데 하나를 두고 간다. 다리가 좋지 않아 목발을 짚고 다녔던 사람들은 다리가 나으면 목발을 올려놓고 가기 때문에 약수 어워뿐 아니라 어떤 어워에서나 목발을 흔히 볼 수 있다.

초원 어워는 광대한 초원 가운데 세운 어워로 이것은 주로 어두운 저녁 시간에 목자(牧者)가 가축이 간 곳을 찾아갈 때, 장소의 대략과 방향을 가늠할 때 도움을 주는 표식으로 삼는 어워이다. 그밖에 기념 어워는 특별한 모임이 있었던 장소나 어떤 왕, 귀족이 머문 곳, 영웅의 위업을 기념할 목적으로 세운 어워이다. 때로는 왕이나 귀족의 자녀가 태어났을 때, 부족의 지도자 등을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경계 어워는 부족 간의 경계를 삼는 어워로 상호 부족 간에 대화를 통해 정한 경계선을 따라 적당한 곳에 세운 어워이다. 이 어워는 부족이나 그 소속원이 해마다 정기적으로 제의를 드리는 풍습이 있다. 헙드 아이막의 하로올이라는 어워는 그 높이가 6-7m에 이른다고 한다. 하로올 어워는 지역의 경계를 나태낼 뿐만 아니라 지방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어워의 제의로는 국가적인 규모 또는 부족이나 가족 등의 단위로 치루는 제의가 있으나 제의에는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참여할 수 없다. 예전에는 제의를 반드시 무당이 주관했으며 여수신인 경우는 남자 무당이, 남수신인 경우 여자 무당들이 제의를 드렸다고 한다. 무당들은 제의를 드릴 때 산천신을 불러 모시며 어워를 9번 돌고 9번 무릎을 꿇어 신께 말씀을 고하고 제물을 뿌려 올렸다. 이러한 무당 중심의 어워제를 지금은 불교의 승려가 주관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무속의 의례를 불교가 흡수한 한 예라 할 수 있다. 어워제가 끝나면 대개 신을 즐겁게 하고, 인간이 신과 함께 동락(同樂)하는 의미의 나담 행사가 열린다.

부족 단위의 제의가 있는 어워에는 다른 이웃 부족이 와서 제의를 드릴 수 없으며, 이 때 말이나 양 등을 신에게 제물로 드린다. 이것을 ‘세테르’하고 하는데, 제물을 죽여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목에 리본을 묶여 산 채로 드린다. 이것은 다분히 불교의 영향을 받은 의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신성하게 구별된 말은 사람이 타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거래를 한다거나 죽이는 법이 없다.

어워를 세울 때는 장소를 주의해 선택한 다음 어워를 세울 장소의 중앙을 깊이 파서 앞서 준비해온 범버(주전자의 일종)에 금, 은, 산호, 진주, 구리, 터키석 등의 아홉 가지 귀금속과 오곡의 종자 등을 함께 넣어 범버의 입구를 밀봉하여 묻고 땅을 평평하게 고른다. 곡식을 넣는 것은 부족민들이 곡식처럼 번성하고 풍부하게 살아갈 것을 상징하는 뜻을 지닌다.

이렇게 한 다음 위에 돌을 둘러가면서 어워를 만든다. 어워의 한 가운데에는 하득으로 장식한 나무를 꽂아 둔다. 일반적으로 나무를 꽂아 세울 때는 주로 버드나무를 사용하며 지역에 따라 낙엽송을 쓰기도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경전을 쓴 천 등을 묶기도 한다. 또 말의 갈기털을 묶어 놓기도 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양이나 염소 새끼의 귀를 묶어 놓은 곳도 있다고 한다. 

알탕 어워는 보통 13개의 어워를 세우는데, 중심의 큰 어워와 동서쪽으로 6개씩 혹은 사방으로 3개씩의 어워를 세운다. 그 밖의 어워에도 중심 어워의 주변에 작은 어워들을 같이 세운 어워들이 많이 있다. 주변의 어워를 지역에 따라 ‘샤비 어워’(제자 어워), ‘젤 어워’(줄 어워). ‘솜망 어워’(화살 어워)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워가 있은 곳을 ‘덕슁 가자르’(지신이나 수신이 머물고 다니는 곳이므로 인간이 함부로 행동을 하면 신이 노여워하기 쉬운 곳으로 매우 조심하고 근신해야 하는 장소를 이른다.)라고 하여 그 주변을 더럽히는 행위를 일체 금한다. 또한 그 장소의 지명이나 어워의 이름을 어워 가까이에서 말하지 않는다. 대소변을 보는 행위는 더욱더 금한다.

알탕 어워인 경우는 여자는 참여하지 못하며 산 밑에서 어워를 바라보며 절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일반 어워는 남녀노소 제한 없이 어워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말에서 내려 돌을 더하고 말의 갈기나 꼬리털 또는 천을 나무에 묶고 돈이나 음식의 가장 좋은 것을 바치는데, 가진 것이 없을 경우 자신의 머리털을 조금 잘라 바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공물로는 흰쌀(차강 보다), 좁쌀(샤르 보다) 등의 곡물과 흰사탕, 유제품, 술 등으로 사찰을 드리며 어워를 시계 방향으로 3번 도는 풍습이 있다.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12.25

이안나 교수의 몽골인의 생활과 풍속 40
몽골의 신앙과 종교 - 불교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에서 발생해 7세기경 티베트에 전파됐다. 티베트 불교를 일명 라마교라 하는데 라마란 티베트 불교에서 ’정신적 스승’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원래는 사원의 지도자나 위대한 스승에게만 붙일 수 있었던 ‘라마’라는 명칭이 오늘날에는 일반 승려에 대한 경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몽골에 들어온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라고 한 이유는 티베트 불교의 새로운 개혁 종파가 경전보다는 스승의 가르침 즉 ‘라마’를 존중한 데서 붙여진 명칭으로 생각된다. 

11세기 인도에서 도래한 티베트 불교의 개혁가인 아티샤(982-1054)는 경전과 개인적 가르침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묻는 제자의 물음에, 직접적인 스승의 가르침만이 올바른 이해를 보증한다고 하여 스승의 가르침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 후 티베트 불교에서 라마는 더욱더 중요한 존재로 부각되었으며, 이 때문에 티베트의 불교를 라마교라고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티샤는 인도의 고승으로 티베트 제자들의 간청으로 마음을 닦는 수행법을 가르쳤다. 그 수행법을 ‘람림’이라 하는데, 람림에서는 가장 먼저 정신적인 스승에게 완전히 의지하라고 가르친다. 이처럼 개혁파 불교에서 스승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이 불교를 곧바로 라마교라고 부르는 것은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라마교라는 것은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몽골 불교를 비하하기 위해 붙여진 명칭이다.

티베트 불교는 불교의 전통적인 계율을 따르면서 티베트 재래 종교인 본교의 무속적 특색을 포용하는 특색을 지닌다. 티베트 불교는 황건파와 홍건파(티베트의 타르마파 승려들이 붉은 모자를 쓰고 다녔다면, 새로운 게룩파의 승려들은 노란색 모자를 쓰고 다닌 것에서 생겨난 말)의 두 경향의 경쟁적 관계 속에서 매우 빠르게 퍼져나갔다. 불교를 현대적인 형태를 가지도록 변화시킨 사람은 티베트의 승려 정호브(총카파)였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를 때때로 ‘정호브교’라고도 부른다.

13세기 티베트 불교는 정치와 종교를 장악하여 심한 부패에 이르게 된다. 승려들의 수행은 겉치레에 불과했으며 참다운 수행과 종교적인 모습이 사라졌다. 14세기 후반 정호브가 등장하면서 세속화된 불교에 종교적 수행과 금욕을 강조하는 개혁을 이룬다.

불교가 몽골에 강하게 전파된 것은 16세기 말 경이지만, 그 이전에도 몇 차례 불교가 전파되었던 역사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흉노시대부터 간헐적으로 불교가 전파되었던 역사자료가 있다. 

토와의 웨이국 시대(386-534) 불교를 국교로 삼고 정치와 종교의 예법에 따라 정책을 세웠다. 토와족들은 당대 몽골에 있던 유연(400-552)족들이 불교를 접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불교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 다음 몽골 땅의 지배적 다수를 차지했던 투르크에는 불교가 전파되었다는 분명한 자료가 있다. 투르크의 제3대 왕은 불교사원과 소브륵(탑)을 세우는 등 불사에 적극적으로 힘썼으며, 그 다음 왕대부터는 불교가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 다음 부족국이었던 위구르에서도 불교가 상당히 널리 퍼졌으나 점차 그 지위가 약해졌다.

불교가 몽골에 들어온 역사적 시기는 13세기이다. 칭기스칸은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세계 정복에 이르게 되었을 때, 여러 나라의 종교 문제에 있어 상당히 관대한 입장을 취했다. 가족 간에 종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각자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도록 했다. 그래서 가족의 어떤 이는 이슬람교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어떤 이는 불교를 선택했다.

이란의 역사가 쪼웨이니는 “칭기스는 어떤 한가지 종교나 신앙을 신봉하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착된 신앙적 태도나 어떤 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낫다고 차별적으로 보는 것을 피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종교적 현자나 수도자라도 차별 없이 존중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칭기스칸은 종교적으로 상당히 관대한 입장에 있었지만 스스로는 전통적인 무속을 신봉하여 결정적인 사건에 마주치면 영원히 푸른 하늘의 가호를 비는 의식을 행하고 무당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또한 외국의 용한 점쟁이나 점성가들의 예언이나 조언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칭기스칸은 거란인 야율아해나 아율초재와 같이 양의 견갑골로 점을 치는 점쟁이들을 주위에 데리고 있었으며, 원정을 떠나기 전 점을 쳐보게 하기도 했다. 또한 도교 교단의 장로인 장춘진인(長春眞人)에게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여 장생의 비법을 묻기도 했다고 한다.

어거대칸 시대 수도 하르호름에는 여러 나라의 다종교가 혼재되어 있어 그 대표자들이 상주하여 살았다. 즉,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의 사원이 있었으며 시에서 활발한 전도 활동을 벌였다. 종교적인 포용 정책으로 몽골에 들어온 다종교 가운데 점차 불교가 몽골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조건을 형성시켰다. 하르호름에 있는 사원에 위구르 승려들이 법회를 열었으며,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불교를 중앙아시아에서 몽골에 전파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9.1.6

이안나 교수의 몽골인의 생활과 풍속 41
몽골의 신앙과 종교 - 불교(2) 

원나라가 중국에 세워지기 전에 몽골 군주국의 초기 칸들은 티베트의 불교와 가까워져 불교를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1220년대부터 몽골과 티베트의 관계가 크게 발전했으며, 1227년 탕구트를 침공한 후 몽골은 티베트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몽골 칸들은 그 당시 불교국이었던 티베트를 직접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유화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권하에 복속시키려는 정책을 썼다. 또한 그들은 티베트 불교를 많은 복속국들을 지배하는 통치도구로 삼고자 했다.

칭기스칸 시절에 일곱 명의 티베트 승려가 몽골에 왔으나, 몽골 무당들의 저항으로 인해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탕구트로 돌아가고 만다. 그들 승려 가운데 찬바-돈고르바 링보치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칭기스칸을 만나 불교의 교훈을 전하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칭기스칸이 탕구트를 침공하고 돌아오던 1227년에 다시 그와 만나 승려들에게 세금과 공무를 면제해 주는 것에 관한 명령을 내렸으며 또 탕구트에 있는 절과 사원을 복원하는 일에 관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또 이 해 칭기스칸은 탕구트의 보르항칸을 만났으며, 그로부터 황금 불상과 황금, 은제 그릇을 선물받았다고 전한다.

몽골의 칸들은 또 중국 불교 승려들과도 적지 않은 교류를 가졌는데, 1219년 중국 불교 승려인 해융이라는 자가 칭기스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칭기스칸은 그에게 불교에 대해 적지 않은 지식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 시절 칭기스칸은 중국의 불승들에게 공무와 세금을 감해주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한 특혜를 다음 왕들도 계속 시행하여, 구육, 멍흐 왕은 해융을 북중국의 불교 지도자로 임명했다.
 
어거대칸은 아버지의 포용 정책을 계승하여 실천했으며 티베트의 승려들과 우호적인 교류를 가졌다. 이 시절 북인도에서 승려들이 몽골에 왔으며, 그들은 궁에 머물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구육왕은 티베트 승려 나모를 모셔와 자신의 스승으로 모셨으며, 멍흐칸은 승려 나모를 국사로 삼고 왕국의 불사를 통괄하도록 했다. 

몽골 군주국의 초기에 불교가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을 확증해 주는 중요 자료는 1346년 씌어진 에르젠 조 사원 터에서 발견된 돌비석이다. 여기 기록을 보면, 어거대칸은 불교 사원의 큰 터를 처음 정했으며 1256년 멍흐칸이 절을 지어 완성한 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대 티베트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원은 1073년에 세워진 사쯔사원이었다. 몽골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사원의 영향력 있는 주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불교를 몽골 제국에 널리 전파시키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일을 위해 티베트에 있던 몽골의 대신 거당과 북중국을 다스리고 있던 쿠빌라이 등이 사쯔 사원의 주지들을 자신들이 살고 있던 곳에 자주 모셔와 만난 것은 불교를 제국에 전파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244년 티베트에 주재하던 대신 거당은 사쯔 사원의 대주지 스님인 공가아잘창에게 초청 서한을 보낸다. 공가아잘창과 거당의 만남은 티베트와 몽골의 관계를 가깝게 하는 데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몽골 칸과 귀족들은 티베트 불교를 상당히 존숭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몽골과 티베트의 관계는 더욱 확대되고, 티베트 불교의 영향이 몽골 왕족들 가운데 더욱 큰 영향력을 가지는 조건을 형성했다.
 
티베트 불교는 쿠빌리아칸이 다스리던 원나라 시대에 몽골 대제국의 중심 종교로 발전한다. 쿠빌라이는 1260년 칸이 되기 전 북중국을 지배하고 있을 때, 불교를 제국의 지배 도구로 삼으려 했던 거당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티베트의 사쯔 사원과 관계를 긴밀히 했다. 그리고 1253년 경 거당의 궁으로 사신을 보내 사쯔 사원의 주지승인 공가아잘창을 모셔오도록 한다. 거당은 2년 전인 1251년에 공가아잘창이 죽었다는 사실을 쿠빌라이에게 알렸으며 한편 공가아잘창의 손자 파스파러더이잘창(1235-1280)이 자신의 옆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1247년 공가아잘창이 거당을 방문할 때 손자 파스파와 그의 동생 차그나도르찌를 데리고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거당은 공가아잘창의 두 손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유심히 살펴보았었다. 거당의 명으로 파스파에게 불경을 공부시키고, 차그나도르찌에게는 몽골 문자를 가르치게 했다. 이렇게 사쯔 사원의 두 아이들은 몽골 대신의 궁 가까이서 교육을 받게 된다.

쿠빌라이칸은 1253년 당시 18세가 된 파스파를 샹도에 있는 자신의 궁에 데리고 와 자신의 제의 승려로 삼았다. 1258년 쿠빌라이 주였을 대 파스파가 도시들을 이긴 일이 있었다. 그 이후 쿠빌라이는 도교를 금하고 불교를 모든 면에서 적극 지원했으며 승려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과 특권을 주게 되었다.

1260년 쿠빌라이칸이 왕좌에 오르면서 파스파를 국사로 추대하고 불교를 제국의 종교로 삼았다. 칸과 왕비, 신하와 귀족들은 파스파에게 계를 받고 불교도가 되기 시작했다. 쿠빌라이칸이 1264년 샨도시에 있을 대 썼던 <솝등 자르릭>이라는 칙서 가운데 몽골 왕에게 보내는 불교 정책을 자세히 언급했다. 그 문서에는 “불법대로 살아가는 불교 승려들은 몽골 대왕에게 복종적이어야 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공적인 의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 불교의 사원에 사신이 거주하거나, 사원 관할 하의 지역과 재산을 사용하거나 소유하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공문서 등을 살펴보면 원나라 시대에 불교가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파스파는 몽골 제국의 정치를 불법(佛法)의 질서로 바로잡고자 했으며, 몽골 왕들을 고대 인도와 티베트 왕들과 동등하게 보아 그들에게 ‘차그라바르디’-불교를 수호하는 무한한 권력의 주인-대왕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었다.

그러나 쿠빌라이칸은 다른 종교에도 상당히 관대하여 카톨릭의 많은 수사들을 받아들이도록 지시했으며, 로마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의 배후에는 카톨릭 신부들을 국사에 이용해 중국 내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더욱 확고히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또 신부들의 앞선 지식과 능력을 이용하려는 계략도 있었다. 원나라 시대 쿠빌라이칸은 서방 카톨릭 신부와 수사에게 나라의 점성술사들과 함께 계절과 천체에 관한 저서를 짓게 했으며, 천문대를 짓는 일을 맡겼다. 1289년 쿠빌라이칸의 명으로 최초의 서방 종교인들(주로 카톨릭)의 사원을 짓게 했다. 일반적으로 몽골에 기독교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전파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나이망, 헤레이드, 엉고드 부족이 기독교를 믿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서방의 종교는 몽골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원나라 시대에 이슬람교도들은 몽골 칸들의 정치적인 행사에 신뢰를 주는 일들은 했으며 비교적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몽골의 많은 종교 가운데 이슬람교 역시 그리 대단한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다. 원나라의 몽골 칸들은 이슬람교도들을 이용하여 주로 중국을 통치하는 정책적 도구로 삼았다.

원나라 시대에 몽골의 칸들은 중국에 널리 퍼져 있던 유교와 도교를 금지하지 않았으며,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지원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융화적 태도는 매우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중국인들 가운데 큰 명성을 얻었거나 영향력이 있는 유가 혹은 도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특별히 도사들에게 공적인 세금을 면제해 주고, 유교 사당을 부흥시키고 제를 드리게 하는 등의 일을 지원했다. 그와 동시에 유교와 도교의 영향을 몽골 지역에 전파되는 것을 보이지 않게 엄격히 규제하는 이중 정책을 썼다. 일반적으로 그 시대 몽골 칸들은 유교와 도교의 가르침을 나라의 중심 종교로 삼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종교적 확산과 영향력을 막기 위해 티베트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사상적으로 중국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의 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불교를 적극 받아들였던 가장 주된 이유는 다종교, 다언어의 나라와 부족들을 불교라는 하나의 정신적 구심점 즉 정치적 통치이념으로 통일시켜 지배하려 했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몽골의 칸들은 종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엄중한 법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쿠빌라이칸의 한 칙령에 티베트의 스님, 수도승 등에게 함부로 손을 댄 사람의 손을 자르고, 함부로 모욕하고 멸시한 사람의 혀를 뽑는 등에 관한 잔혹한 법을 제정하고 스님들에게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권한을 법으로 분명히 했다.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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